존 C. 브레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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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C. 브레킨리지는 1821년 켄터키주에서 태어났으며, 변호사, 정치인, 군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미국 하원 의원과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부통령을 역임했으며, 186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남북 전쟁 중에는 남부 연합에 가담하여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전쟁 후 해외로 망명했다가 사면을 받고 귀국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87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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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인 제퍼슨 데이비스는 아메리카 연합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연합을 이끌었으며, 노예제 옹호와 남부 연합 지도자로서의 역할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존 C. 브레킨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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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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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존 캐벌 브레킨리지 |
출생일 | 1821년 1월 16일 |
출생지 | 렉싱턴, 미국 |
사망일 | 1875년 5월 17일 |
사망지 | 렉싱턴, 미국 |
안장 장소 | 렉싱턴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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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메리 버치 (1843년 결혼) |
자녀 | 6명, 클리프턴과 존 포함 |
부모 | 캐벌 브레킨리지 메리 클레이 스미스 |
친척 | 브레킨리지 가문 존 위더스푼 (증조부) |
교육 | 센터 칼리지 (문학사) 뉴저지 칼리지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 |
정치 경력 | |
직위 | 미국 부통령 미국 연합국 육군 장관 |
미국 부통령 순서 | 14대 |
미국 부통령 재임 시작 | 1857년 3월 4일 |
미국 부통령 재임 종료 | 1861년 3월 4일 |
미국 부통령 대통령 | 제임스 뷰캐넌 |
미국 부통령 전임자 | 윌리엄 R. 킹 |
미국 부통령 후임자 | 해니벌 햄린 |
미국 연합국 육군 장관 순서 | 5대 |
미국 연합국 육군 장관 재임 시작 | 1865년 2월 6일 |
미국 연합국 육군 장관 재임 종료 | 1865년 5월 10일 |
미국 연합국 육군 장관 대통령 | 제퍼슨 데이비스 |
미국 연합국 육군 장관 전임자 | 제임스 세던 |
미국 연합국 육군 장관 후임자 | 폐지 |
미국 상원 의원 | 켄터키주 |
미국 상원 의원 재임 시작 | 1861년 3월 4일 |
미국 상원 의원 재임 종료 | 1861년 12월 4일 |
미국 상원 의원 전임자 | 존 J. 크리텐든 |
미국 상원 의원 후임자 | 개럿 데이비스 |
미국 하원 의원 | 켄터키주 제8선거구 |
미국 하원 의원 재임 시작 | 1851년 3월 4일 |
미국 하원 의원 재임 종료 | 1855년 3월 3일 |
미국 하원 의원 전임자 | 찰스 모어헤드 |
미국 하원 의원 후임자 | 알렉산더 마셜 |
켄터키 주 하원 의원 | 페이엣 카운티 |
켄터키 주 하원 의원 재임 시작 | 1849년 |
켄터키 주 하원 의원 재임 종료 | 1850년 |
정당 | |
소속 정당 | 민주당 남부 민주당 (1860년) |
군사 경력 | |
소속 | 미국 자원군 미국 연합국 육군 |
복무 기간 | 1847–1848 (미국) 1861–1865 (남부 연합) |
계급 | 소령 (미국) 소장 (남부 연합) |
전투 | 미국-멕시코 전쟁 미국 남북 전쟁 샤일로 전투 배턴루지 전투 스톤스 리버 전투 잭슨 전투 치카모가 전투 채터누가 전역 뉴마켓 전투 콜드 하버 전투 (부상) 피드몬트 전투 린치버그 전투 모노카시 전투 불스 갭 전투 매리언 전투 쿨 스프링 전투 |
2. 어린 시절
존 C. 브레킨리지는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존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아래에서 법무 장관을 지냈고, 아버지 조지프는 저명한 변호사이자 주의 정치인이었다. 브레킨리지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전에 켄터키 주의 센터 칼리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수학하여 1841년에 졸업하였다.
변호사로서 어디에서 개업할지 결정하는 동안 렉싱턴에 머물렀으며, 존 J. 크리튼든(토마스 레오니다스 크리텐든의 아버지)의 서재에서 법률 서적을 빌려 사용했다. 렉싱턴에 변호사가 너무 많다고 판단한 그는 프랭크포트로 이주했지만 사무실을 구할 수 없었다. 옛 동급생인 토마스 W. 불록과의 연애가 실패한 후, 더 나은 기회를 찾아 1841년 10월 10일에 아이오와 준주로 떠났다. 그들은 브레킨리지가 상속받은 일리노이주 자카슨빌의 토지에 정착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변호사회에 스티븐 A. 더글러스와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이오와주 버링턴으로 계속 이동했고, 1842년에서 1843년 겨울까지 브레킨리지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법률사무소가 버링턴에서 거의 모든 사무소보다 많은 사건을 처리한다고 보고했다. 불록과 아이오와 주민들의 영향을 받아 미국 민주당에 동조했고, 1843년 2월에는 아이오와주 데모인 군의 민주당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대부분의 켄터키 브레킨리지 가문은 미국 휘그당 소속이었고, 그의 조카의 당적을 알게 된 윌리엄 브레킨리지는 "마치 내 딸의 명예가 훼손된 것을 들은 것과 같았다"고 선언했다.
1843년 5월, 켄터키를 방문했다. 어머니와 브레킨리지 가족 간의 중재 노력으로 방문이 길어졌고, 독감에 걸린 후 아이오와의 추운 날씨로 돌아가는 대신 여름을 켄터키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불록의 사촌인 메리 사이린 버치 브레킨리지를 만났고, 9월에는 약혼했다. 10월에 브레킨리지는 아이오와로 가서 사업을 정리한 후 켄터키로 돌아와 토마스의 사촌인 새뮤얼 불록과 함께 법률 사무소를 설립했다. 1843년 12월 12일에 결혼하여 켄터키주 조지타운에 정착했다.[2]
2. 1. 가문과 출생
존 캐벨 브레킨리지는 1821년 1월 16일 켄터키주 렉싱턴 근처의 가족 소유지인 쏜 힐에서 태어났다.[1] 조셉 "캐벨" 브레킨리지와 메리 클레이(스미스) 브레킨리지 사이의 여섯 자녀 중 넷째이자 외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햄프든-시드니 대학교를 설립한 새뮤얼 스탠홉 스미스의 딸이자 독립선언문 서명자 중 한 명인 존 위더스푼의 손녀였다.[1] 아버지 캐벨 브레킨리지는 켄터키주 하원 의장을 역임했고, 아들 출생 직전 켄터키주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브레킨리지가 태어난 지 한 달 후인 2월, 가족은 주지사 존 에이더와 함께 프랭크퍼트의 주지사 관저로 이사하여 아버지가 국무장관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1823년 8월, "만연하는 열병"으로 불리는 질병이 프랭크퍼트를 강타했고, 캐벨 브레킨리지는 자녀들을 데리고 렉싱턴에 있는 어머니 댁에 머물렀다. 돌아온 후, 그와 아내는 모두 병에 걸렸다. 캐벨 브레킨리지는 사망했지만 아내는 살아남았다. 그의 재산은 빚을 갚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미망인은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자녀들과 함께 렉싱턴에 머물렀다. 렉싱턴에 있는 동안, 브레킨리지는 우드포드 카운티의 피스가 아카데미에 다녔다.[1] 그의 할머니는 미국 상원 의원이자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시절 법무장관을 역임했던 고인이 된 남편 존 브레킨리지의 정치 철학을 그에게 가르쳤다. 존 브레킨리지는 주 의원으로서 1798년 켄터키 결의안을 발의하여 주권을 강조하고 외국인 및 반역죄 법에 대한 응답으로 무효화 원칙을 지지했다.
1832년 브레킨리지의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 다툼이 있은 후, 어머니, 여동생 레티시아와 함께 켄터키주 댄빌로 이사하여 여동생 프랜시스와 그녀의 남편이자 센터 칼리지 총장이었던 존 C. 영과 함께 살았다. 브레킨리지의 삼촌인 윌리엄 브레킨리지도 그곳 교수진에 있었기 때문에 1834년 11월에 입학했다. 베리아 매고핀, 윌리엄 버니, 시어도어 오하라, 토마스 L. 크리텐든, 제레미아 보일이 그의 급우였다. 1838년 9월 학사 학위를 받은 후, 다음 겨울을 뉴저지 대학교(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수료생"으로 보냈다. 1839년 중반 켄터키로 돌아와 판사 윌리엄 오슬리 밑에서 법률 공부를 했다. 1840년 11월, 렉싱턴의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 2년차 법학 과정에 등록했는데, 조지 로버트슨과 켄터키 항소 법원의 토마스 A. 마셜이 그의 강사였다. 1841년 2월 25일 법학사 학위를 받았고, 다음 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켄터키주 렉싱턴 근처 "캐벨스 데일"에서 조셉 캐벨 브레킨리지와 메리 클레이 스미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브레킨리지 가문은 켄터키주에서 유서 깊은 가문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상원의원이자 법무장관을 지낸 존 브레킨리지이다. 아들은 하원의원이자 외교관을 지낸 클리프턴 브레킨리지이며, 손자에는 배우 존 캐벨 "버니" 브레킨리지가 있다.
2. 2. 초기 교육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존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아래 법무 장관을 지냈고, 그의 부친 조지프는 저명한 변호사이자 주의 정치인이었다. 브레킨리지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기 전에 켄터키주의 센터 칼리지에서 수학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수학하여 1841년에 졸업하였다.1839년 켄터키주 던빌의 센터 칼리지(Centre College)를 졸업하고, 이후 뉴저지 대학교(현재의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렉싱턴의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Transylvania University)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840년 변호사가 되어 아이오와주 버링턴으로 이주했으나, 곧 렉싱턴으로 돌아와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1843년 메리 세일린 버치(Mary S. Burch)와 결혼했다. 학교를 떠난 후 아이오와주와 켄터키주에서 법률을 실행하였고 1843년 메리 시렌 버치에게 결혼하였다. 브레킨리지 부부는 후에 5명의 자식을 두었다. 다음에 브레킨리지는 미국-멕시코 전쟁이 일어난 동안 지원군으로 지냈으나 전투는 보지 못하였다.
2. 3. 결혼과 가정
브레킨리지는 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오와주와 켄터키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1843년 메리 시렌 버치와 결혼하였다. 브레킨리지 부부는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두었다.[1]3. 법조 경력
1839년 켄터키주 던빌의 센터 칼리지(Centre College)를 졸업하고, 이후 뉴저지 대학교(현재의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렉싱턴의 트랜실베이니아 대학교(Transylvania University)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840년 변호사가 되어 아이오와주 버링턴으로 이주했으나, 곧 렉싱턴으로 돌아와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1843년 메리 세일린 버치(Mary S. Burch)와 결혼했다.[2]
브레킨리지는 변호사로서 어디서 개업할지 결정하는 동안 렉싱턴에 머물렀으며, 존 J. 크리튼든(John J. Crittenden, 토마스 크리튼든의 아버지)의 서재에서 법률 서적을 빌려 사용했다. 렉싱턴에 변호사가 너무 많다고 판단한 그는 프랭크포트로 이주했지만 사무실을 구할 수 없었다. 옛 동급생인 토마스 W. 불록(Thomas W. Bullock)과의 동업이 실패한 후, 그는 더 나은 기회를 찾아 1841년 10월 10일에 아이오와 준주로 떠났다. 그들은 브레킨리지가 상속받은 일리노이주 자카슨빌의 토지에 정착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변호사회에 스티븐 A. 더글러스와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이오와주 버링턴으로 계속 이동했고, 1842년에서 1843년 겨울까지 브레킨리지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법률사무소가 버링턴에서 거의 모든 사무소보다 많은 사건을 처리한다고 보고했다. 불록과 아이오와 주민들의 영향을 받아 그는 미국 민주당에 동조했고, 1843년 2월에는 아이오와주 데모인 군의 민주당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대부분의 켄터키 브레킨리지 가문은 미국 휘그당 소속이었고, 그의 조카의 당적을 알게 된 윌리엄 브레킨리지는 "마치 내 딸의 명예가 훼손된 것을 들은 것과 같았다"고 선언했다.
브레킨리지는 1843년 5월에 켄터키를 방문했다. 어머니와 브레킨리지 가족 간의 중재 노력으로 방문이 길어졌고, 독감에 걸린 후 아이오와의 추운 날씨로 돌아가는 대신 여름을 켄터키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불록의 사촌인 메리 사이린 버치 브레킨리지를 만났고, 9월에는 약혼했다. 10월에 브레킨리지는 아이오와로 가서 사업을 정리한 후 켄터키로 돌아와 토마스의 사촌인 새뮤얼 불록과 함께 법률 사무소를 설립했다. 그는 1843년 12월 12일에 결혼하여 켄터키주 조지타운에 정착했다. 그 부부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조셉 캐벨(1844년생), 클리프턴 R. 브레킨리지(1846년생; 후에 아칸소주 출신의 국회의원), 프랜시스(1848년생), 존 밀턴(1849년생), 존 위더스푼 브레킨리지(1850년생), 메리 디샤(1854년생)이다. 변호사로서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브레킨리지는 1845년에 가족과 함께 렉싱턴으로 다시 이사하여 미래의 상원의원 제임스 B. 벡과 함께 사무소를 설립했다.[2]
4. 군 복무
존 C. 브레킨리지는 미국-멕시코 전쟁과 남북 전쟁에 참전했다.
미국-멕시코 전쟁에서는 소령으로 복무했으나,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남북 전쟁에서는 사이먼 볼리바르 버크너의 추천으로 1861년 11월 2일 남군의 준장으로 임명되었고,[11] 11월 16일 켄터키 제1여단을 지휘했다. 이 여단은 켄터키 주 정부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낀 병사들로 구성되어 "고아 여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11]
1862년 4월, 샤일로 전투에서 예비 군단을 지휘, "호박벌의 둥지"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여 50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고, 얼마 후 소장으로 진급했다.[12] 8월에는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1] 1863년 1월, 스톤스강 전투에서 브랙스턴 브래그의 무모한 공격 명령으로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 브래그와 갈등을 겪었다.
1863년 6월, 빅스버그 방어에 참여했고, 9월에는 치카모가 전투에서 남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해 가을, 채터누가 포위 공격에 참여했으나, 11월 채터누가 전투에서 미셔너리 릿지에서 조지 H. 토머스 장군의 공격을 받아 패했다. 브래그는 패전 책임을 브레킨리지에게 돌리며 그가 술에 취해 있었다고 비난했다.
1864년 2월, 리치먼드로 불려가 셰넌도어 계곡을 포함한 버지니아 서부 지역을 지휘하게 되었고, 5월 뉴마켓 전투에서 버지니아 군사 연구소 사관생도들과 함께 프란츠 지겔 장군의 북군을 몰아내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콜드하버 전투에서 북군 공격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주벌 얼리 장군과 함께 워싱턴 D. C. 급습 작전에 참여, 1864년 7월 모노케이시 전투와 2차 컨스타운 전투에 참전했다. 버지니아 남서부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10월 솔트빌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부하들이 북군 흑인 병사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64년 11월, 테네시주로 원정을 떠나 불스갭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인력과 보급품 감소로 버지니아 서부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렀다.
1865년 1월, 브레킨리지는 아메리카 연합국의 마지막 전쟁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남군 항복을 앞두고 전쟁 수행 노력을 관리했으며,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게릴라전을 통해 전쟁을 연장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4. 1. 미국-멕시코 전쟁

멕시코-미국 전쟁을 지지했던 브레킨리지는 켄터키 주의 저명한 민주당원 윌리엄 올랜도 버틀러 소장의 참모로 임명되기를 원했으나, 버틀러는 무보수 보좌관직만 제안했고 그 자리를 거절할 것을 권고했다.[3] 1847년 7월, 브레킨리지는 프랭크포트에서 멕시코-미국 전쟁 중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전사한 켄터키 주 출신 병사들을 추모하는 대규모 군 장례식에서 연설했다. 이 연설은 아들이 전사한 켄터키 주 휘그당 상원의원 헨리 클레이를 눈물짓게 했고, 시어도어 오하라가 "죽음의 야영"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1847년 8월 31일, 켄터키 주 주지사 윌리엄 오슬리가 추가로 두 개의 연대를 요청하자 브레킨리지는 다시 군 장교 임관을 신청했다. 오슬리의 자문관들은 휘그당 주지사에게 최소한 한 명의 민주당원에게 장교 임관을 줄 것을 권고했고, 휘그당 상원의원 존 J. 크리텐든은 브레킨리지의 신청을 지지했다. 1847년 9월 6일, 오슬리는 만리우스 발레리우스 톰슨을 대령, 토마스 크리텐든을 중령, 브레킨리지를 제3 켄터키 보병 연대의 소령으로 임명했다. 11월 1일 연대는 켄터키 주를 떠나 11월 21일 베라크루스에 도착했다. 베라크루스에서 "라 보미토"(La Vomito) 또는 황열병의 심각한 유행이 발생하자,[3] 연대는 서둘러 멕시코시티로 향했다. 브레킨리지는 지친 병사들이 그의 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여정 중 이틀을 제외하고는 걸었다고 한다. 12월 18일 멕시코시티에 도착했을 때 전투는 거의 끝났고, 이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채 1848년 5월 30일까지 점령군으로 남아 있었다.
군사 훈련보다는 그의 법률 전문 지식에 대한 수요가 더 많았던 그는 기디언 존슨 필로우에 대한 조사 재판에서 윈필드 스콧에 의해 보조 변호사로 임명되었다. 스콧의 대통령 야망을 좌절시키려고 필로우와 그의 지지자들은 스콧이 아닌 필로우를 콘트라레스 전투와 추루부스코 전투에서의 미국의 승리로 칭찬하는 편지를 작성하여 발표했다. 자신의 개입을 숨기기 위해 필로우는 자신이 쓴 편지에 대한 책임을 부하에게 떠넘겼다. 브레킨리지의 전기 작가인 윌리엄 C. 데이비스는 브레킨리지가 필로우의 음모를 알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썼다. 그의 역할은 몇몇 증인들을 심문하는 것으로 제한되었고, 기록에 따르면 필로우는 재판에서 스스로를 대변했다.
7월 16일 루이빌로 돌아온 제3 켄터키 연대는 7월 21일에 해산되었다. 멕시코에 있었던 기간 동안 1,000명의 연대원 중 100명 이상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브레킨리지의 군 복무는 그의 정치적 전망에 도움이 되었다.
4. 2. 남북 전쟁
사이먼 볼리바르 버크너의 추천으로 1861년 11월 2일 브레킨리지는 남군 준장으로 임명되었다.[11] 11월 16일, 그는 제1 켄터키 여단의 지휘를 맡았다.[11] 이 여단은 켄터키주의 연방주의 정부에 버려졌다고 느낀 병사들로 구성되어 "고아 여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11] 브레킨리지는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장군 휘하에서 복무했다.
1862년 4월, 브레킨리지는 샤일로 전투에서 예비 군단을 지휘했고, 그의 부대는 "호박벌의 둥지"로 알려진 곳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여 5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얼마 후,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다.[12]
그해 8월, 브레킨리지는 북군으로부터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를 탈환하려는 시도를 이끌었으나 실패했다.[11] 이후, 그는 테네시주 머프리스보로 근처에서 브랙스턴 브래그의 군대에 합류했다. 1863년 1월, 스톤스강 전투에 참전한 브레킨리지의 부대는 브래그가 무모한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이 사건으로 브레킨리지와 브래그는 갈등을 겪었고, 남은 기간 동안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1863년 6월, 브레킨리지는 빅스버그 방어에 참여했고, 9월에는 치카모가 전투에서 남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의 부대는 북군의 좌측면을 공격하여 약 30%의 사상자를 냈다. 그해 가을, 브레킨리지는 채터누가에서 브래그의 포위 공격에 참여했다. 1863년 11월 채터누가 전투에서 그의 부대는 미셔너리 릿지에서 조지 H. 토머스 장군의 공격을 받아 행군 명령을 받았다. 브래그는 채터누가 패배의 책임을 브레킨리지에게 돌리며, 그가 전투 중 술에 취해 있었다고 비난했다.
브래그의 비난 속에서도 1864년 2월, 브레킨리지는 리치먼드로 불려가 셰넌도어 계곡을 포함한 버지니아 서부 지역을 지휘하게 되었다. 1864년 5월, 뉴마켓 전투에서 그는 버지니아 군사 연구소 사관생도들과 함께 프란츠 지겔 장군의 북군을 몰아내는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브레킨리지는 콜드하버 전투에서 북부 버지니아 육군을 지원하여 북군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후, 브레킨리지는 주벌 얼리 장군과 함께 워싱턴 D. C.를 급습하는 작전에 참여하여 1864년 7월 모노케이시 전투와 2차 컨스타운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버지니아 남서부에서 군대를 지휘한 그는 10월 솔트빌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북군 흑인 병사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브레킨리지는 이 행위에 분노했지만, 책임자들을 체포하는 데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64년 11월, 그는 테네시주로 원정을 떠나 불스갭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인력과 보급품이 감소하면서 그는 그해 말 버지니아 서부에서 일련의 소규모 전투를 치렀다.
1865년 1월, 브레킨리지는 아메리카 연합국의 마지막 전쟁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865년 4월, 남군의 항복을 앞두고 전쟁 수행 노력을 관리하는 데 힘썼다. 이 기간 동안 브레킨리지는 조직적인 적대 행위 종식을 주장하며,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게릴라전을 통해 전쟁을 연장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5. 정치 경력
1849년 브레킨리지는 켄터키주 하원 의석을 얻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1851년 민주당 소속으로 미국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855년까지 재임했다. 하원 시절, 브레킨리지는 설득력 있는 연설로 주목받는 남부 출신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1856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과 함께 14대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의 정치 경력은 정점에 달했다. 당시 34세였던 브레킨리지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부통령이었다.[4]
1860년 대선에서 브레킨리지는 민주당 남부 분파의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는 노예제 옹호 정책을 주장하면서도, 아메리카 합중국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선거 결과, 브레킨리지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스티븐 A. 더글러스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비록 대선에서는 패배했지만, 1861년 3월 켄터키주 의회는 그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남북 전쟁 발발 이후에도 브레킨리지는 상원 의원직을 유지하며, 켄터키주가 남부 연합에 가담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켄터키주가 연방 잔류를 결정하자, 체포를 우려한 그는 9월 남부로 피신했다.[2]
5. 1. 초기 정치 경력 (1849-1856)
1849년 브레킨리지는 켄터키주 하원 의석을 얻으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851년 민주당 소속으로 미국 하원에 선출되어 1855년까지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브레킨리지는 하원에서 설득력 있는 연설로 유명한 남부 출신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856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과 함께 14대 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그의 입지는 더욱 커졌다. 당시 34세였던 브레킨리지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부통령이었다.[4]1854년 2월, 켄터키 주의회에서 다수당이었던 휘그당은 선거구 재분할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으로 브레킨리지의 선거구에서 오언 카운티가 제외되고 해리슨과 니콜라스 카운티가 추가되었다. 켄터키주에서 노우-낫싱당이 부상하면서 브레킨리지의 재선 가능성은 낮아졌고, 그는 임기 만료와 함께 하원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1854년 12월, 피에르 술레가 사임하자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브레킨리지를 주 스페인 미국 공사로 지명했다. 상원이 이 지명을 승인했지만, 브레킨리지는 1855년 2월 8일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그의 하원 임기는 1855년 3월 4일에 끝났다.[5]
5. 2. 부통령 시절 (1857-1861)
1856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14대 부통령에 선출되면서, 브레킨리지의 정치 경력은 급상승했다. 34세의 나이로 당선된 그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부통령이었다.[5] 선거 운동 포스터에는 뷰캐넌과 브레킨리지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었다.1860년 대선에서 브레킨리지는 민주당 남부 분파의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노예제 옹호 강령을 내세우면서도, 남부의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아메리카 합중국을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선거 결과, 브레킨리지는 일반 투표에서 에이브러햄 링컨과 스티븐 A. 더글러스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1861년 3월 켄터키주 의회는 그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임명했다.[2]
남북 전쟁 발발 이후에도 브레킨리지는 상원 의원직을 유지했으며, 갈등이 심화되자 고향 켄터키주에 남부 연합 가담을 촉구했다. 켄터키주가 연방 잔류를 선택하자, 체포를 우려한 그는 9월 남부로 피신했다.[2]
185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브레킨리지는 신시내티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했다. 피어스의 지명 가능성이 낮아지자, 브레킨리지는 스티븐 더글러스를 지지했지만, 더글러스 역시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사퇴하여 제임스 뷰캐넌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5]
일리노이주 출신의 켄터키 태생 하원의원 윌리엄 알렉산더 리차드슨은 브레킨리지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 뷰캐넌의 선거 운동에 균형을 맞추고 더글러스나 피어스의 지지자들을 달랠 수 있다고 제안했다.[5] 브레킨리지는 부통령 후보 지명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켄터키 출신의 전 하원 의장 린 보이드(Linn Boyd)에 대한 존중을 표하며 사퇴했다.[5]
첫 번째 부통령 후보 투표에서 브레킨리지는 후보 지명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55표를 얻어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켄터키는 보이드를 지지하여 33표를 얻게 했다. 브레킨리지의 강세를 본 많은 대의원들이 2차 투표에서 그에게 투표했고, 결국 만장일치로 그의 지명이 확정되었다.[5]
1856년 대선에서 브레킨리지는 뷰캐넌과 함께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다. 그는 오하이오주, 인디애나주, 미시간주, 켄터키주, 펜실베이니아주 등지에서 연설하며 공화당의 당선은 연방 해체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 브레킨리지의 활약으로 민주당은 켄터키주에서 1828년 이후 처음으로 승리했다.[2] 뷰캐넌과 브레킨리지는 존 C. 프리몬트와 윌리엄 L. 데이턴을 누르고 174표의 선거인단 표를 얻어 당선되었다.[5]
1857년 3월 4일 취임 당시 36세였던 브레킨리지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부통령이었다.[5] 그러나 뷰캐넌은 브레킨리지가 자신을 지지하기 전에 피어스와 더글러스를 지지했던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했다.[5] 뷰캐넌은 브레킨리지와 거의 상의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만남은 드물었다.[5]

상원 의장으로서 브레킨리지는 토론 참여에 제한이 있었지만, 공정하고 우아하게 의장직을 수행하여 존경을 받았다.[5] 1859년 1월 4일, 구 상원 의사당에서 마지막 연설을 통해 의회가 연방을 보존할 해결책을 찾기를 바란다고 말했다.[5] 그는 헌법이 "평화와 전쟁, 번영과 역경을 극복"하여 "공공 질서와 양립하는 더 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해왔다고 말했다.[5] 브레킨리지는 "다른 시대의 다른 상원이 새롭고 더 큰 의사당으로 이 헌법을 활기차고 훼손되지 않은 채 옮길 것"이라는 희망을 표명했다.[5]
브레킨리지는 연방 정부가 주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했지만, 분리주의는 합법적이지만 국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2]
존 크리텐든의 상원 임기는 1861년까지였지만, 켄터키주 의회는 1859년에 그의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해 모였다.[5] 브레킨리지는 조슈아 프라이 벨을 누르고 81대 53표로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5] 1859년 12월 21일 켄터키주 하원에서 행한 수락 연설에서 브레킨리지는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판결을 지지하고, 존 브라운의 하퍼스 페리 습격은 공화당원들이 "흑인 평등" 또는 폭력을 주장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5] 그는 어떤 형태로든 저항이 결국 필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5]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브레킨리지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뉴욕 타임즈''는 "부통령의 별은 구름 위로 더 높이 떠오른다"고 평가했다.[5] 민주당 유력 후보였던 더글러스는 브레킨리지가 후보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는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심화시켰다.[5]
186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브레킨리지는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지명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대의원들은 더글러스와 구드리 사이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5] 결국 남부 대의원들은 퇴장했고, 볼티모어에서 별도의 회합을 열어 브레킨리지를 대통령 후보로, 오리건주의 조셉 레인(Joseph Lane)을 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5]
브레킨리지는 당의 분열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2] 그는 분리주의를 선호한다는 비난을 부인하며, "나는 미국 시민이자 켄터키 주 출신으로서, 헌법과 연합에 대한 헌신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 행위나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2]
4자 대결에서 브레킨리지는 18.1%의 득표율로 인기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지만, 미국 선거인단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5] 최종 선거인단 투표 결과는 링컨 180표, 브레킨리지 72표, 벨 39표, 더글러스 12표였다.[5] 브레킨리지는 심남부 주들과 메릴랜드, 델라웨어와 같은 미국 남북 전쟁의 국경주에서 승리했지만, 고향 켄터키주에서는 벨에게 패했다.[5]
1861년 2월 13일, 부통령으로서 브레킨리지는 링컨이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해야 했다.[5] 그는 크리텐든 타협안을 지지했지만, 상원의 승인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2] 1861년 3월 4일, 임기 마지막 날, 브레킨리지는 그의 후임 부통령인 해니벌 햄린에게 취임 선서를 시켰고, 햄린은 브레킨리지를 포함한 새로 선출된 상원의원들에게 취임 선서를 시켰다.[5]
5. 3. 1860년 대통령 선거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브레킨리지는 민주당의 남부 분파 소속으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노예제 옹호 강령을 내세우면서도, 동시에 아메리카 합중국(미국)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일반 투표에서 브레킨리지는 에이브러햄 링컨과 스티븐 A. 더글러스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1861년 3월 켄터키주 의회는 그를 상원의원으로 선출했다. 브레킨리지는 남북 전쟁 발발 이후에도 상원 의원직을 유지했고, 갈등이 심화되자 자신의 고향인 켄터키주가 연방에서 탈퇴하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켄터키주가 연방에 잔류하기로 결정하자, 체포될 것을 우려한 브레킨리지는 9월 남부로 피신했다.[2]
1859년 초,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제임스 헨리 해먼드는 브레킨리지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고했지만, 1860년 1월까지도 브레킨리지는 가족들에게 지명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5]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의 유력 주자였던 더글러스는 브레킨리지가 후보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이는 브레킨리지에 대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미온적인 지지와 연방 노예법에 대한 브레킨리지의 공개 지지와 맞물려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심화시켰다.
1860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열렸다. 브레킨리지를 지지한 주요 인물 중에는 전 켄터키 주지사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라자러스 W. 파월, 전 켄터키 주 하원의원 윌리엄 프레스턴(먼 친척), 법률 파트너 제임스 브라운 클레이, 그리고 제임스 B. 벡이 있었다. 브레킨리지는 전당대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제임스 구드리가 후보로 남아 있는 한 자신을 지명하지 말라고 지지자들에게 지시했다. 57번의 투표 과정에서 더글러스는 압도적인 다수를 유지했지만, 필요한 3분의 2의 다수를 얻지 못했고, 구드리는 꾸준히 2위를 차지했다. 후보를 지명할 수 없게 되자, 대의원들은 6월 18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다시 모이기로 결정했다.
연방 노예법 조항 채택에 실패한 것에 항의하여 찰스턴 전당대회를 퇴장했던 친 남부 대의원들은 볼티모어 전당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5일간의 논의와 투표 끝에 더글러스와 허셜 베스파시안 존슨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항의하는 대의원들은 같은 날 볼티모어에서 회합을 가졌다. 첫 번째 투표에서 브레킨리지는 81표를 받았고, 전 상원의원인 뉴욕주의 대니얼 S. 디킨슨은 24표를 받았다. 디킨슨 지지자들은 점차 브레킨리지에 대한 지지로 바꾸어 그의 지명을 만장일치로 만들었고, 오리건주의 조셉 레인이 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당의 분열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브레킨리지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했다.[2]
반대자들은 브레킨리지가 분리주의 권리를 믿고 연합의 분열을 선호한다고 비난했지만, 그는 프랭크포트에서의 연설에서 이를 부인했다. 그는 북부 주에서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남부 주 대부분이 브레킨리지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4자 대결에서 브레킨리지는 18.1%의 득표율로 인기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지만, 미국 선거인단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최종 선거인단 투표 결과는 링컨 180표, 브레킨리지 72표, 존 벨 39표, 더글러스 12표였다. 브레킨리지는 심남부 주들을 승리했지만, 그 주들에서의 그의 지지는 노예 인구가 적은 시골 지역에서 주로 나왔다; 노예 인구가 많은 도시 지역은 일반적으로 벨이나 더글러스를 지지했다. 브레킨리지는 또한 메릴랜드주와 델라웨어주와 같은 미국 남북 전쟁의 국경주를 가져갔다. 그는 미주리주에서 더글러스에게, 버지니아주와 테네시주에서 벨에게 패했다. 벨은 브레킨리지의 고향인 켄터키 주도 차지했다. 링컨은 북부 주 대부분을 휩쓸었지만, 뉴저지주는 선거인단 표를 분할하여 링컨에게 4표, 더글러스에게 3표를 주었다. 1861년 2월 13일, 부통령으로서 브레킨리지는 링컨이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해야 했다.
5. 4. 상원 의원 시절 (1861)
브레킨리지는 7개 주가 이미 탈퇴한 상황에서 상원 의원으로 취임하여, 노예제 옹호에 있어 수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8] 헌법 원칙 하에 주들을 재통합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고자,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연방군을 남부연합 주에서 철수시킬 것을 촉구했다.[9]3월 28일 의회 회기가 끝난 후, 4월 2일 켄터키 주 의회 연설에서 그는 주들의 평화적인 화해를 옹호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국경 주 회의를 제안했다.[9] 그러나 4월 12일 남부연합군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회의 계획은 무산되었다.[10]
이후 브레킨리지는 주지사 베리아 매고핀에게 켄터키의 입장을 결정하기 위한 주권 협약 소집을 권고했다.[2] 5월 10일, 주의 다음 행동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에 대표 6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2] 주권 대표로는 브레킨리지, 매고핀, 리처드 호스가, 연방주의자 대표로는 존 J. 크리텐던, 아치볼드 딕슨, 새뮤얼 스미스 니콜라스가 참여했다.[2] 이들은 켄터키가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무장할 것을 권고했으나, 브레킨리지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의회에서 승인되면 따르기로 했다.[2]
6월 특별 선거에서 연방 옹호 후보들이 켄터키 하원 대표단 10석 중 9석을 차지했다.[2] 7월 특별 회기에 상원으로 돌아온 브레킨리지는 남부연합 동조 때문에 반역자로 여겨졌다.[2] 그는 링컨의 병력 모집, 무장, 전쟁 자금 지출, 인신 보호 영장 정지 조치를 헌법 위반으로 규탄하며, 링컨에게 전쟁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10] 그는 평화로운 분리를 선호하며, 켄터키가 연방 정부 편을 들 경우 상원 의원직을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2]
1861년 9월 초, 연방군과 남부연합군이 모두 켄터키의 중립을 깨뜨렸다.[7] 연방주의자들은 찰스 S. 모어헤드를 체포하고 친남부연합 성향의 신문을 폐간했으며, 토머스 E. 브램릿 장군이 브레킨리지를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
구금을 피하기 위해 1861년 9월 19일 렉싱턴을 떠난 브레킨리지는 남부연합 동조자들과 합류하여 남부연합이 장악한 켄터키주 볼링그린으로 갔다.[10] 주 의회는 즉시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2]
1861년 10월 8일, 브레킨리지는 유권자들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연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켄터키는 자신의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부 대의를 옹호하고 연방주의자 주 의회를 비난하며, 상원 의원직을 군인의 소총과 바꾸겠다고 선언했다.[2]
그는 며칠 전 남부연합군에 공식적으로 입대하여 1861년 11월 6일 반역죄로 기소되었다.[2] 1861년 12월 2일, 그는 미국 상원에서 반역자로 선포되었고,[8] 12월 4일, "켄터키주 출신 본원 의원 존 C. 브레킨리지가 그의 조국의 적에 가담하여 그가 지지하기로 맹세했던 정부에 대해 무기를 들고 있으므로: 그러므로—결의한다. 그 반역자 존 C. 브레킨리지는 상원에서 축출된다"라는 결의안이 36대 0으로 채택되어 상원에서 축출되었다.[5][8][9]
6. 남북 전쟁 이후
북군에 체포될 것을 우려한 브레킨리지는 남북 전쟁 종전 후 해외로 도피했다가 1869년 사면을 받고 귀국했다.[28] 귀국 후, 그는 정치 복귀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변호사 업무에 복귀했으며, 여러 기업의 임원을 역임했다.
브레킨리지는 버지니아의 피드먼트 생명 보험 회사(곧 피에드먼트 앤 아링턴 보험 회사가 됨)의 켄터키 지점 매니저가 되었다. 또한, 신시내티 서던 철도의 총고문으로 일했으며,[2] 루이빌 앤 내슈빌 철도의 독점에 맞서 신시내티를 렉싱턴을 거쳐 채터누가까지 연결하는 철도 건설을 추진했다. 비록 초기에는 의회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2년 후 승인을 얻어 1873년 건설이 시작되었다.[2]
그는 새로 설립된 엘리자베스타운, 렉싱턴, 빅 샌디 철도 회사의 사장으로, 콜리스 포터 헌팅턴으로부터 엘리자베스타운과 렉싱턴을 빅 샌디 강에 연결하는 철도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확보했다. 1873년 공황으로 인해 마운트 스털링까지의 노선만 완공되었지만, 제안된 노선은 1881년에 완공되었다.
브레킨리지는 수정 헌법 14조에 따라 공직 취임이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계 복귀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그는 "나는 전과 같은 정치적 흥분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마치 멸종된 화산과 같다."라고 말했다.[5] 그는 사적인 시민으로서 쿠 클럭스 클랜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흑인의 법정 증언을 합법화하는 주 법률 통과를 지지하는 등 사회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1873년부터 건강 문제를 겪기 시작한 브레킨리지는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호전되지 않았다. 1875년 5월 17일, 간경변으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8] 그의 시신은 렉싱턴 묘지에 안장되었다.
6. 1. 망명 생활
북군에 체포될 것을 우려한 브레킨리지는 남북 전쟁이 끝날 무렵 쿠바로 피신했다. 이후 영국과 캐나다로 이동했다. 토론토에서 가족과 재회한 후, 유럽으로 장기간 여행을 떠났다. 1869년 대통령의 사면으로 미국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되자, 브레킨리지는 망명 생활을 끝냈다.[28] 그는 정치 복귀 요청을 거절하고 고향 렉싱턴에 정착하여 변호사 업무를 재개했다.구체적인 망명 경로는 다음과 같다:
순서 | 국가/지역 | 주요 내용 |
---|---|---|
1 | 쿠바 | 남북전쟁 직후 피신, 카르데나스를 거쳐 하바나에 도착하여 잠시 머무름. |
2 | 영국 | 7월 말 도착, 전 남부 연합 정보원들과 상의 및 캐나다에 있는 가족과 연락. |
3 | 캐나다 (토론토, 나이아가라) | 1865년 9월 가족과 재회, 1868년 6월까지 가족과 함께 거주. |
4 | 유럽 및 중동 | 1866년 중반 ~ 1868년 초,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 성지 등 방문. 이탈리아 여행 중 로마에서 비오 9세 교황을 알현하고 폼페이 유적 방문. |
미국 연방 정부로부터 반역죄로 기소될 것을 우려하여 해외 탈출을 결심했던[28] 브레킨리지는 1865년 5월 15일, 매디슨에서 남부 연합 해군 소속 대위였던 존 테일러 우드(John Taylor Wood)와 합류했다.[18] 게인스빌에서 남부 연합 대령 존 잭슨 디키슨(John Jackson Dickison)을 만나 배를 얻었고, 세인트 존스 강을 따라 이동하여 5월 29일 포트 버틀러에 도착했다. 세인트 존스 강을 따라 하니 호수까지 계속 이동하여 배를 마차에 싣고 약 약 19.31km 정도를 이동하여 인디언 강에 있는 샌드 포인트(오늘날의 타이투스빌)에 도착했다.[18] 5월 31일 강에 도착했지만 남쪽으로 강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배를 강의 갯벌과 여울을 가로질러 끌어야 했다. 엘보 크릭(멜버른)에 있는 존 C. 휴스턴(John C. Houston)의 집에 멈춰 배를 상륙시켜 틈을 메웠다. 수리가 완료되자 존 테일러 우드 대령이 다시 일행을 남쪽으로 이끌었다.[18] 주피터 인렛 근처에서 대서양으로 배를 옮겨 플로리다 해안을 따라 이동하여 6월 4일 현재의 팜 비치 근처에 상륙했다. 강한 바람으로 소형 선박을 바다로 항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6월 5일, 일행은 연방군 증기선에 발견되었지만 해안을 청소하는 사냥꾼이라고 설득했다. 이틀 후, 돛대와 삭구가 있는 더 큰 배를 발견하여 추격하여 승무원의 무장을 해제하고 배를 납치했다. 더 항해에 적합한 이 배를 이용하여 쿠바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포트 달라스를 출발하여 해적과 두 차례의 큰 폭풍,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은 후 1865년 6월 11일 카르데나스에 도착했다.
1868년 12월, 존슨 대통령이 모든 남부 연합군에게 일반 사면을 발표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브레킨리지의 오랜 법률 파트너였던 제임스 벡(James Beck)은 그에게 사면 발표 전에 미국으로 돌아오라고 조언했다.[28]
6. 2. 귀국과 사망
북군에 체포될 것을 우려한 브레킨리지는 남북 전쟁 말기에 쿠바로 피신했고, 이후 영국과 캐나다로 이동했다. 토론토에서 가족과 재회한 후 유럽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1869년 대통령의 사면으로 미국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되자, 브레킨리지는 망명 생활을 끝냈다. 정치 복귀 요청을 거절하고 고향 렉싱턴에 정착하여 변호사 업무를 재개했다. 그는 버지니아의 피드먼트 앤드 알링턴 보험 회사의 켄터키 지점장과 엘리자베스타운, 렉싱턴 앤드 빅샌디 철도 회장을 역임했다.1875년 5월 17일 고향에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8] 렉싱턴 묘지에 안장되었다.
7.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선거인단) | 결과 | 당락 |
---|---|---|---|---|---|---|---|
1850년 선거 | 하원의원 (켄터키 제8선거구) | 32대 | 민주당 | 52.45% | 5,671표 | 1위 | |
1852년 선거 | 하원의원 (켄터키 제8선거구) | 33대 | 민주당 | 52.10% | 6,532표 | 1위 | |
1856년 선거 | 미국의 부통령 | 14대 | 민주당 | 45.28% | 1,836,072표 (174명) | 1위 | |
1860년 선거 | 상원의원 (켄터키 제3부) | 37대 | 민주당 | 100.00% | 1표 | 1위 | |
1860년 선거 | 미국의 대통령 | 16대 | 입헌민주당 | 13.06% | 47,532표 (37명) | 2위 | 낙선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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